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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한 여인을 위해 교황과 결별하다

헨리 8세: 사랑, 신앙, 권력이 충돌한 잉글랜드의 군주사랑, 왕권, 신앙이 충돌한 순간, 한 왕의 결정이 중세 유럽의 질서를 흔들었다. 헨리 8세는 왜 교황과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까? 여섯 명의 왕비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파장을 중심으로, 그 복잡하고도 드라마틱한 진실을 사료에 기반해 풀어본다.왕세자 헨리, 형의 미망인과 결혼하다헨리는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의 형 아서 튜더는 1501년,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 결혼했으나, 결혼 직후 사망한다.아서의 죽음은 헨리에게 왕위 계승의 길을 열어주었고, 정치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헨리와 캐서린의 재혼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는 구약성서의 금혼법(레위기 20:21)을 우회할 수 있는 특별 ..

서양의 역사 2025.05.12

시즈가타케 전투 정리, 히데요시의 기적 같은 진군과 승리

시즈가타케 전투: 천하를 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질주혼노지의 변 직후, 오다 가문 후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전세를 뒤집고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을까? 시즈가타케 전투의 전개와 전략, 그리고 승부의 결정적 순간을 파헤친다.전투의 배경 – 주군을 잃은 전국1582년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일본의 패권자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피살되었다. 그의 중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은 전국시대 일본 열도를 다시 격랑 속으로 몰아넣었다.이 소식을 주고쿠 지역에서 모리 가문과 교전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전장에서 들었다. 그는 즉시 모리 가문과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서쪽 전선을 정리한 뒤, 전례 없는 속도로 동쪽으로 진군한다.그 결과, 히데요시는 야..

일본의 역사 2025.05.12

패왕 항우, 천하를 얻지 못한 영웅의 최후, 초한전쟁

패왕 항우, 천하를 얻지 못한 영웅의 최후, 초한전쟁초나라 명문 출신 항우는 진나라 멸망 후 천하의 패자가 되었으나, 정치력과 민심에서 유방에 밀려 초한전쟁에서 패했다. 해하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그는 우희와 이별하며 자결했고, 무용은 빛났으나 시대를 얻지 못한 비운의 영웅으로 남았다.태어남과 혈통 – 초나라 명문의 후예항우(項羽), 본명 항적(項籍)은 기원전 232년, 초나라 회계군(會稽郡, 지금의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그의 조부는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이며, 아버지 또한 일찍이 전장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항우는 삼촌 항량(項梁) 밑에서 자랐다.“항우는 글은 읽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고, 병법도 끝내 익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들은 것은 잊지 않았고, 힘은 ..

중국의 역사 2025.05.12

조선 왕권의 갈림길,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정치적 승리

조선 왕권의 갈림길,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정치적 승리1398년 음력 8월, 조선 건국 6년 만에 조선 왕조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중심이 되어 세자 이방석과 개국공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사건, 즉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는 단순한 왕자 간의 내분이 아닌, 조선의 권력 구조와 정치 이념을 뒤바꾼 정치 쿠데타였다.갈등의 배경 – 왕권과 신권의 충돌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정도전 등 신권 중심의 관료 세력에게 정국 운영을 크게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 문제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태조에게는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아들 여섯 명이 있었고, 이 중 다섯째인 이방원은 고려 말 위화도 회군, 조선 건국, 왕조 창업에 핵심적인 역할..

한국의 역사 2025.05.1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미친 영향

사제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관계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만 아니라 교육과 정치에서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후에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철학적 교훈을 넘어서, 고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인연이 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만남기원전 34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는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필리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사로 초빙한다.알렉산드로스가 약 13세였을 때였다. 이 만남은 단순한 교육적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한 명이 되지만, 그의 사고와 가..

서양의 역사 2025.05.1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임진왜란으로 향한 전환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임진왜란으로 향한 전환점서민 출신에서 전국 무대의 중심으로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미카와국(三河国)의 하급 무사도 아닌, 오와리국(尾張国)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본명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이며, 젊은 시절에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어 그의 시종으로 출발하였다.『太閤記』에 따르면, 그는 재치 있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으며,조직 내에서는 항상 윗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성격 덕에 점차 군공을 세우며 중용되었고, 마침내는 시코쿠 및 주고쿠 정벌의 주축 장수로 성장하였다.혼노지의 변과 기민한 대응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히데요시는 당시 모리 가문과 전..

일본의 역사 2025.05.11

항우와 유방의 대립과 한나라의 부상

항우와 유방의 대립과 한나라의 부상진 제국의 몰락과 영웅들의 부상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사망과 조고의 전횡으로 진 제국은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15년 만에 세워진 절대왕조는 백성들의 피로감과 혹독한 형벌, 그리고 무리한 토목 사업으로 인해 반발을 불렀다.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거병하면서 각지에서 봉기 군이 일어났다. 혼란 속에서 두 명의 인물이 무대에 오른다. 초나라 명문가 출신의 항우(項羽), 그리고 하층 백성 출신의 유방(劉邦)이다.항우 – 천하무쌍의 군웅항우는 초나라 명문 출신으로, 삼촌 항량(項梁)에게 무예와 병법을 배웠다. 항량이 죽은 뒤,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며 반진(反秦)의 선봉에 섰다. 그는 기원전 207년, 거록(鉅鹿) 전투에서 진나라 정예군을 대파하며 천하의 주..

중국의 역사 2025.05.11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임진왜란 속 한글의 실용성과 부활“나라가 무너질 때, 문자는 살아남았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하였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나라 전체가 무너지고 있던 그 시기, 지식인의 언어였던 한문은 위기를 맞았다.소통이 되지 않았고, 백성과 관료 간의 행정이 마비되었다. 바로 그때, 세종이 남긴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즉 한글이 다시 등장한다.선조실록 속 ‘언문’의 부활평소 유교 원칙을 중시하던 선조는, 한문 사용을 고수하던 군주였다.그러나 전란의 상황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지방관과 군사, 백성들과 빠르게 소통해야 하는 전시 상황에서, 문장이 빨라야 했고, 모두가 이해할 수 ..

한국의 역사 2025.05.11

그림자 재판, 철학이 묻다

그림자 재판, 철학이 묻다― 동굴의 비유, 중용의 덕,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전쟁이 남긴 상처, 철학이 시작한 질문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파르타의 점령을 받아들였다.민주정은 붕괴되고, 30인의 과두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전복되었다. 그 혼란의 시기 속에서, 아테네는 한 노철학자를 죽였다.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기원전 399년, 아고라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이 재판을 지켜본 제자 플라톤은 깊은 충격을 받았고, 철학의 길로 본격 들어선다.동굴 속의 사람들 – 플라톤의 비유플라톤은 저서 『국가(Politeia)』에서,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현실 인식을 ‘동굴의 비유’로 설명하였다.“그들은 평..

서양의 역사 2025.05.10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이유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이유오다 노부나가의 말년 –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1580년대 초, 오다 노부나가는 사실상 일본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다케다, 아자이, 아사쿠라, 이마가와, 미요시 등의 유력 세력은 궤멸하거나 복속되었고, 모리, 우에스기, 호조 등 동서강국도 점차 노부나가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노부나가는 1582년, 시코쿠 정벌을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와 동시에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대한 방비를 위해 토요토미 히데나가와 미나미 간토 지역에 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그 해 5월, 히데요시는 서국(西国)의 모리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 최종전을 위해 노부나가는 교토 인근의 사찰 ‘혼노지(本能寺)’에 머무르며 군세..

일본의 역사 2025.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