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시즈가타케 전투 정리, 히데요시의 기적 같은 진군과 승리

오늘의 기록자 2025. 5. 12. 18:49

시즈가타케 전투: 천하를 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질주

혼노지의 변 직후, 오다 가문 후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전세를 뒤집고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을까? 시즈가타케 전투의 전개와 전략, 그리고 승부의 결정적 순간을 파헤친다.

전투의 배경 – 주군을 잃은 전국

1582년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일본의 패권자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피살되었다. 그의 중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은 전국시대 일본 열도를 다시 격랑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소식을 주고쿠 지역에서 모리 가문과 교전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전장에서 들었다. 그는 즉시 모리 가문과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서쪽 전선을 정리한 뒤, 전례 없는 속도로 동쪽으로 진군한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며 오다 가문의 최대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끝은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지지한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가 있었다. 그는 에치젠을 중심으로 북국의 거점과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히데요시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두 세력은 오다 가문 후계의 정통성을 두고 무력 충돌로 치달아갔다.

전투의 시작 – 시즈가타케를 선점하라

1583년 봄, 시바타 가쓰이에는 선봉으로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를 파견하여 기후 북부의 전략 요충지 시즈가타케를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모리마사는 지휘부의 명령을 어기고 무리하게 진격했고, 그 결과 시즈가타케 일대에서 병력이 고립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틈을 노리고 히데요시는 군을 이끌고 번개처럼 진군하였다.
그는 하치만에서 시즈가타케까지 약 50여 km를 불과 하루 만에 주파하였고,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속도였다. 『카와카쿠 태합기(川角太閤記)』는 이 전격 진군을 “신이 내린 군단 운용”이라 기록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무장들의 이름을 세우다

히데요시는 도착 즉시 반격을 지시하였고, 시즈가타케 일대에서 맹렬한 역습전이 벌어졌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것은 훗날 '칠본창(七本槍)'이라 불리는 젊은 무장들이었다.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단독 돌격과 백병전에서 적군을 격파하며 이름을 떨쳤고, 이 전투를 계기로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결국 모리마사의 부대는 무너졌고, 퇴각 중에 포위되어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본거지인 에치젠으로 패주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택에 불을 지르고 부인 오이치(노부나가의 여동생)와 함께 자결하였다.
이는 북국 최대 세력 시바타 가문의 붕괴를 의미하는 동시에,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 내부의 최대 라이벌을 제거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전투의 의의 – 천하를 향한 문이 열리다

시즈가타케 전투는 단순한 가신 간의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 구도에서 군사력으로 정통성을 주장한 전환점이었다. 이 승리를 통해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영향력을 흡수하였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장수와 세력들이 그에게 귀속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무장들은 훗날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침략하는 선봉장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는 그들의 '무명에서 일약 명장으로' 도약한 출세의 무대가 되었다.

사료와 평가 – 히데요시의 진면목

카와카쿠 태합기』는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신속한 판단과 병력 운용을 “태합다운 통찰력과 결단”이라 평가하였다.
《太閤記》 또한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그 누구보다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문장으로 그의 속도전을 극찬하고 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보여주었던 전격전 전략의 계승이자, '속도로 전장을 지배한다'는 전국시대의 새로운 승리 공식이었다.

결론 – 무력으로 세운 정통성

시즈가타케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전쟁의 사령탑으로 완전히 떠오른 전쟁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으로 움직이던 시대는 이 전투를 끝으로 저물고, 히데요시라는 이름이 직접 천하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갈등을 봉합하고, 오다와라 정벌을 통해 전국의 다이묘를 제압하며 ‘한 농민 출신의 유일한 일본 통일자’라는 전무후무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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