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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그 후

수도원이 사라진 날, 영국 사회가 흔들렸다.1536년부터 단행된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은 단순한 종교 개혁이 아니었다. 중세의 복지 체계, 지역 공동체의 중심, 신앙의 상징이 사라지며 영국 사회 전반이 격변에 휩싸였다. 수도원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사료와 사례로 깊이 있게 살펴본다.수도원, 그 전까지 무엇이었는가수도원은 수도자들의 거처만은 아니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수도원은 병원, 학교, 고아원, 노인복지시설의 기능을 수행한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었다.가령 요크셔의 펀티프랙트 수도원은 하루 수십 명의 빈민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으며, 글로스터셔의 수도원은 지역 농민 자녀에게 기초교육을 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수도원은 또한 농지를 관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제적 중심지였고, 고..

서양의 역사 2025.05.13

도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코마키 전투의 진짜 승자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천하를 놓고 맞붙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1584년, 일본 통일 전쟁의 분수령이 된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맞붙은 이 전투는, 결과만 보면 승자 없는 싸움 같지만, 그 이면에는 전략과 정치의 치열한 대결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태합기》, 《신장공기》, 《도쿠가와실기》 등 사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정세와 양측의 평가, 그리고 이 전투가 전국시대 말기 일본사에 끼친 결정적인 전환점을 깊이 있게 풀어본다. 전투의 배경: 갈라진 천하, 불붙는 야망1584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 전투의 승리로 오다 가문 내 주도권을 확보하며 천하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

일본의 역사 2025.05.13

제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왕위 쟁탈전과 조선의 권력 재편

제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왕위 쟁탈전과 조선의 권력 재편조선 개국 후 불과 8년이 지난 1400년, 젊은 나라인 조선은 또다시 권력의 피바람 속에 휩싸였다. 한때 '새 나라'의 이상을 설계하던 정도전은 이미 죽었고, 권력을 향한 야망은 여전히 살아남은 왕자들 사이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싸움의 중심에는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 이방원,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있었다.태조의 퇴위와 불안정한 정국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은 정도전과 어린 세자 이방석을 제거하며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직접 왕이 되지 않고, 둘째 형 이방과를 옹립하여 정종(定宗)으로 즉위시킨다. 이방원은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지만, 왕자의 피를 묻힌 손으로 곧장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다.정종의 치세는 이..

한국의 역사 2025.05.13

항우와 우희 - 패왕의 마지막 밤, 사랑과 운명의 해하가

항우와 우희 – 패왕의 마지막 밤, 사랑과 운명의 해하가초나라 명장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 해하 전투의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펼쳐지는 비극적 최후. 『사기』를 바탕으로 항우와 우희의 마지막 순간을 깊이 있게 다룬다. 역사 속 비극의 커플, 항우와 우희기원전 202년, 중국의 천하통일을 두고 벌어진 초한전쟁은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라는 두 영웅의 충돌로 절정을 맞이한다. 그 전쟁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여인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녀는 바로 우희(虞姬), 항우가 사랑했던 여인이다.항우는 본명 항적(項籍), 초나라 명장 항연의 손자이며, 회계군(會稽郡) 출신이다. 그는 탁월한 무장으로 반진(反秦)의 선봉에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정치력과 외교에서는 유방에게 밀렸다.그리고 그의 삶의 끝..

중국의 역사 2025.05.13

헨리 8세, 한 여인을 위해 교황과 결별하다

헨리 8세: 사랑, 신앙, 권력이 충돌한 잉글랜드의 군주사랑, 왕권, 신앙이 충돌한 순간, 한 왕의 결정이 중세 유럽의 질서를 흔들었다. 헨리 8세는 왜 교황과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까? 여섯 명의 왕비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파장을 중심으로, 그 복잡하고도 드라마틱한 진실을 사료에 기반해 풀어본다.왕세자 헨리, 형의 미망인과 결혼하다헨리는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의 형 아서 튜더는 1501년,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 결혼했으나, 결혼 직후 사망한다.아서의 죽음은 헨리에게 왕위 계승의 길을 열어주었고, 정치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헨리와 캐서린의 재혼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는 구약성서의 금혼법(레위기 20:21)을 우회할 수 있는 특별 ..

서양의 역사 2025.05.12

시즈가타케 전투 정리, 히데요시의 기적 같은 진군과 승리

시즈가타케 전투: 천하를 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질주혼노지의 변 직후, 오다 가문 후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전세를 뒤집고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했을까? 시즈가타케 전투의 전개와 전략, 그리고 승부의 결정적 순간을 파헤친다.전투의 배경 – 주군을 잃은 전국1582년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일본의 패권자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피살되었다. 그의 중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은 전국시대 일본 열도를 다시 격랑 속으로 몰아넣었다.이 소식을 주고쿠 지역에서 모리 가문과 교전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전장에서 들었다. 그는 즉시 모리 가문과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서쪽 전선을 정리한 뒤, 전례 없는 속도로 동쪽으로 진군한다.그 결과, 히데요시는 야..

일본의 역사 2025.05.12

패왕 항우, 천하를 얻지 못한 영웅의 최후, 초한전쟁

패왕 항우, 천하를 얻지 못한 영웅의 최후, 초한전쟁초나라 명문 출신 항우는 진나라 멸망 후 천하의 패자가 되었으나, 정치력과 민심에서 유방에 밀려 초한전쟁에서 패했다. 해하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그는 우희와 이별하며 자결했고, 무용은 빛났으나 시대를 얻지 못한 비운의 영웅으로 남았다.태어남과 혈통 – 초나라 명문의 후예항우(項羽), 본명 항적(項籍)은 기원전 232년, 초나라 회계군(會稽郡, 지금의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그의 조부는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이며, 아버지 또한 일찍이 전장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항우는 삼촌 항량(項梁) 밑에서 자랐다.“항우는 글은 읽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고, 병법도 끝내 익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들은 것은 잊지 않았고, 힘은 ..

중국의 역사 2025.05.12

조선 왕권의 갈림길,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정치적 승리

조선 왕권의 갈림길,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정치적 승리1398년 음력 8월, 조선 건국 6년 만에 조선 왕조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중심이 되어 세자 이방석과 개국공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사건, 즉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는 단순한 왕자 간의 내분이 아닌, 조선의 권력 구조와 정치 이념을 뒤바꾼 정치 쿠데타였다.갈등의 배경 – 왕권과 신권의 충돌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정도전 등 신권 중심의 관료 세력에게 정국 운영을 크게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 문제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태조에게는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아들 여섯 명이 있었고, 이 중 다섯째인 이방원은 고려 말 위화도 회군, 조선 건국, 왕조 창업에 핵심적인 역할..

한국의 역사 2025.05.1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미친 영향

사제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관계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만 아니라 교육과 정치에서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후에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철학적 교훈을 넘어서, 고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인연이 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만남기원전 34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는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필리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사로 초빙한다.알렉산드로스가 약 13세였을 때였다. 이 만남은 단순한 교육적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한 명이 되지만, 그의 사고와 가..

서양의 역사 2025.05.1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임진왜란으로 향한 전환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임진왜란으로 향한 전환점서민 출신에서 전국 무대의 중심으로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미카와국(三河国)의 하급 무사도 아닌, 오와리국(尾張国)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본명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이며, 젊은 시절에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어 그의 시종으로 출발하였다.『太閤記』에 따르면, 그는 재치 있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으며,조직 내에서는 항상 윗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성격 덕에 점차 군공을 세우며 중용되었고, 마침내는 시코쿠 및 주고쿠 정벌의 주축 장수로 성장하였다.혼노지의 변과 기민한 대응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히데요시는 당시 모리 가문과 전..

일본의 역사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