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오늘의 기록자 2025. 5. 11. 07:39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 임진왜란 속 한글의 실용성과 부활

“나라가 무너질 때, 문자는 살아남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하였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나라 전체가 무너지고 있던 그 시기, 지식인의 언어였던 한문은 위기를 맞았다.
소통이 되지 않았고, 백성과 관료 간의 행정이 마비되었다. 바로 그때, 세종이 남긴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즉 한글이 다시 등장한다.

선조실록 속 ‘언문’의 부활

평소 유교 원칙을 중시하던 선조는, 한문 사용을 고수하던 군주였다.
그러나 전란의 상황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지방관과 군사, 백성들과 빠르게 소통해야 하는 전시 상황에서, 문장이 빨라야 했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3일

“예조에 명하여 각 고을에 구휼 방책을 언문으로 써서 민간에 나누어 보게 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한글 공문서’를 지방에 내려보낸 사례 중 하나이다. 백성들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언문으로 된 행정 명령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여성의 글’에서 ‘전시 행정어’로

훈민정음은 16세기까지 여성의 문자, 궁중 속말, 사사로운 편지글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전란의 상황에서 그것은 행정의 최전선, 실용의 중심으로 변화했다.

  • 전쟁 중에 실시간으로 전황을 보고하거나 지시할 때, 훈민정음은 속도와 접근성에서 압도적인 이점을 보였다.
  • 군량 조달, 피란 유도, 민심 안정 방안 등이 한글로 작성되어 전단지, 교서 형태로 각 지역에 배포되었다.
  • 또한 궁중 여성들, 특히 인목대비를 비롯한 왕실 부인들이 한글로 기록한 편지나 명령이 여전히 남아 있다.

훈민정음은 더 이상 사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전시 행정 언어로, 생존을 위한 공공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민중의 문자가 되다 – 비공식 기록의 확산

한편, 민간에서도 한글은 놀라운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 한글로 된 피란 기록, 가족 서신, 기도문, 전쟁 민담이 이 시기 다수 남아 있다.
  • 특히 『어미의 편지』, 『이산해 부인 한글 기도문』 등은 전쟁 중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며 쓴 정감 넘치는 한글 기록으로, 이 시대 민중의 심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산해 부인 한글 기도문』 (1593년경 추정)

“내 자식이 이 난리를 이겨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느님, 부처님, 하늘님, 다 들어주소서.”

 

종교와 사상이 뒤섞이고, 공적인 문장이 붕괴된 시대. 한글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담는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실용과 감성, 동시에 살아남은 문자

한글은 전쟁 기간 동안 단순히 ‘편한 문자’였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진 권력과 행정, 교육 체계 속에서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문자였다.

  • 행정적 실용성: 빠른 전달, 쉬운 이해
  • 감정적 공감성: 백성이 직접 쓰고 읽고 느낄 수 있는 언어
  • 문화적 생명력: 민간문학, 노래, 기도문, 구술 기록의 기반

이는 결국 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 여성 문학, 민중 문화로 이어진다. 즉, 한글은 임진왜란이라는 파괴 속에서, 조선의 진짜 문화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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