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그 후

오늘의 기록자 2025. 5. 10. 02:55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그 후

– 훈민정음, 억압 속에서도 피어난 민중의 문자

찬란한 시작, 그러나 조용한 탄압의 서막

1443년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하였다.
그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글을 쓰지 못하니, 이를 가엾게 여겨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장은 『훈민정음』 서문(예의편)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자의 등장은 곧 기득권의 반발을 초래했다.

『세종실록』 25년 12월

“정창손, 최만리 등은 아뢰기를, ‘지금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중국의 도를 본받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와 가까워집니다.’ 하였다.”

 

최만리와 집현전 일부 학자들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식 독점층인 사대부는 한문을 쓸 줄 아는 소수였다.
한글이 널리 퍼지면 자신들의 권위와 독점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세종은 이들의 반대를 물리쳤고, 훈민정음은 일단 세상에 나왔지만, 이미 그 탄생 순간부터 정치적 논쟁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세조 – 훈민정음을 억누르다

세종이 죽은 뒤, 그 아들 문종은 병약한 몸으로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손자 단종이 즉위하였지만, 곧 계유정난(1453년)으로 인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능력 있는 군주였으나,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유교적 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종이 만들었던 ‘파격적이고 실용적인 실학적 유산들’은 대부분 억제되거나 사라졌다. 훈민정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조실록』 10년

“예문관 학사들이 언문(訓民正音)을 쓰는 것을 금지하노라.”

 

세조는 훈민정음을 공식 문서에서 배제하였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1. 유교 경전은 오직 한문으로 읽고 써야 한다는 보수주의
  2. 한글이 민중에게 퍼질 경우 정보 통제의 어려움

이에 따라 한글은 궁중과 일부 여성을 제외하고 공식적인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글을 지킨 사람들 – 궁녀, 승려, 민중

비록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한글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여성, 불교계, 민간 문학을 통해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갔다.

궁중 여인들은 여전히 한글로 편지를 쓰고 일기를 기록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내훈』과『여사서』 등 여성 대상 훈화서적이다.

불교계에서는 『석보상절』(수양대군이 만든 불경 언해본), 『월인석보』 등이 한글로 간행되었다. 민간에서는 가사, 민요, 한글 편지 등으로 퍼져나갔다. 한글은 엘리트가 아닌 백성의 손에 살아남은 문자였다. 이 시기 한글은 국가의 글자가 아닌, 침묵 속의 저항이자, 말 없는 기록이었다.

중종 – 조심스러운 부활, 그러나 갈등의 불씨

1506년, 중종이 즉위한다. 그는 연산군의 폭정을 끝낸 쿠데타로 왕이 된 군주였다.
초기에는 유교적 이상 정치, 민본주의를 표방하며 조심스레 훈민정음의 활용을 늘리려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중종실록』 21년 8월에 기록된 『언문청 설립』이다.
언문청은 한글 번역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삼강행실도』, 『효경언해』 등 유교 윤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내 갈등이 발생한다. 바로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다.

  • 훈구파: 개국공신 중심, 실용적 정치 강조, 한글 활용에도 유연하다.
  • 사림파: 성리학적 원칙 강조, 유교 경전은 반드시 한문이어야 한다.

사림은 점차 정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한글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 또는 배척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글은 “비문(非文), 속문(俗文)”이라 불렸고, 공적 교육과 문서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살아남다 – 여성, 민간, 종교의 힘

이 모든 억압 속에서도 한글은 공적 질서 아래의 비공식 영역에서 계속 확산되었다.
중종~명종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존재한다.

  • 여성 교육서: 『내훈』, 『동몽선습언해』, 『소학언해』
  • 의학서 한글화: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등
  • 가사문학: 『청산별곡』, 『관동별곡』 등 수많은 정감 있고 해학적인 가사가 만들어 진다.

즉, 한글은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지만, 백성의 삶에서는 점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결론 – 억압을 넘어 문화로

훈민정음은 탄생 순간부터 기득권과 충돌했고, 세조와 사림의 시대를 지나며 억압을 받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 그것은 엘리트의 언어가 아닌 백성의 언어였기에,
  • 권력의 도구가 아닌 삶의 기록이었기에,
  • 지배가 아닌 공감과 소통의 문자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종은 “백성이 말하고 쓰는 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글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수백 년 동안 견디고, 결국 조선의 말과 문화, 그리고 오늘의 한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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