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현실 위에 이상을 세운 임금
– 태종의 칼 위에 글을 세우다
태종이 남긴 ‘절대 왕권’, 세종이 펼친 ‘이상 정치’
세종대왕은 1397년에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방원은 세종이 어릴 적부터 학문과 품행이 탁월함을 알아보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종에 대해 “성품이 너그럽고 공손하며, 총명하고도 깊은 뜻이 있다”고 평하였다.
세종은 1418년, 아버지 태종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종 시대는 태종이 수렴청정을 중단한 142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단지 유약한 학문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태종이 피로 일군 왕권 중심 체제를 기반으로, 그것을 활용해 유교적 이상정치와 실용 중심의 문명국가를 만들어낸 현실주의자였다.
신하를 믿되 통제한 왕 – 집현전과 의정부 운영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을 장려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 말이 곧 권력을 나눴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종실록』 6년 1월 12일
“임금은 아랫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며, 충신의 충고를 귀히 여겨야 하느니라.”
이 말처럼 세종은 신하의 말을 경청했지만, 그것은 최종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였다.
대표적인 예가 집현전이다. 세종은 학문을 장려하고 정치를 뒷받침할 지식 기반을 만들기 위해 집현전을 확대 개편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단지 학문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법제, 농업, 천문,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정책적 조언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이 왕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경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현전은 어디까지나 보좌 기관이지, 공동 통치 기관이 아니었다.
백성을 위한 실용의 길 – 과학 기술의 진흥
세종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 군주였다. 하지만 그 사랑은 단지 말이 아닌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된 실천이었다.
농업 – 『농사직설』 편찬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농사의 발전은 곧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세종은 신하 정초에게 명하여 각 지역의 실제 농업 기술을 조사하여 『농사직설』(1429년)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조선 최초의 한글 농서로, 실용적 지식의 집대성이었다.
천문과 시간 – 『혼의』와 『앙부일구』 제작
세종은 하늘의 운행을 백성의 삶에 연결시키는 데 주목했다.
그리하여 장영실, 이천, 김조 등 과학자들에게 명하여 천문기기(혼천의, 간의)와 해시계(앙부일구) 등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백성은 하늘을 보지 않아도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고, 절기를 따라 농사 계획도 가능해졌다.
강우 측정기 – 『측우기』 발명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역시 이 시기 장영실이 제작하였다. 세종은 “홍수와 가뭄은 하늘의 뜻이니, 반드시 실측하여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모두가 글을 알게 하라 – 훈민정음 창제
세종대왕의 통치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은 단연코 훈민정음 창제(1443년)이다.
세종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글을 쓰지 못하니, 슬프도다”라고 하며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훈민정음은 단지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과 권력이 소수 사대부에게만 독점되던 시대에, 백성을 위한 도구를 만든 사건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내가 백성을 사랑하여 새 글자를 지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고 날마다 쓰게 하려 함이다.”
훈민정음은 이후 한글로 발전하며 민족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글이 곧 힘”이라는 역사의 증거가 되었다.
유교적 이상정치의 구현 – 경연과 사대부 등용
세종은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삼았으며, 이를 단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제도와 실천으로 구현하였다.
- 경연제도: 매일 아침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강독하며 정치적 논의의 기준으로 삼았다. 단순한 교육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정책으로 연결시키는 자리였다.
- 사대부 등용: 세종은 능력 있는 인재를 신분에 관계없이 발탁하였다. 실제로 중인 출신인 장영실이 궁중 최고 기술직까지 오른 것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다.
군사와 외교의 균형 – 현실을 잊지 않은 이상주의자
세종은 이상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군주였다.
- 북방 4군 6진 개척(김종서 등): 여진족 침입에 대비해 북방을 정벌하고 안정적인 국경선을 확립하였다.
- 대마도 정벌(이종무, 1419년): 왜구의 침입에 맞서 쓰시마 섬을 직접 공격, 조선의 위상을 각인시켰다. 이는 문화 중심 국가가 아닌, 강한 국방을 갖춘 자주국가로서의 조선의 의지를 보여준다.
결론 – 이상을 실현한 현실주의자, 세종
세종은 태종이 만든 ‘칼 위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그 위에 글과 제도, 사랑과 실용을 세운 임금이었다.
그는 왕권을 기반으로 신하를 길렀고, 백성을 중심에 두고 과학과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대의 조선은 단지 안정된 국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국가, 배움이 있는 국가, 기록이 살아 있는 국가였다.
세종은 이상을 추구했지만, 공허한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 위에서 이상을 실현한,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위대한 성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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