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새로운 시대를 연 칼끝, 이성계의 선택”

오늘의 기록자 2025. 5. 6. 17:22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탄생

회군 이후의 정치 상황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했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닌 고려의 지배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회군 직후 그는 정적인 최영과 우왕을 축출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우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으나 이는 명백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계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기존 권문세족이 대립하는 구도로 재편되었다. 이성계는 조민수,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과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단순히 군사 반란 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들이었다.

권문세족의 몰락과 개혁 정책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은 고려 말 부패한 정치의 상징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사대부들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고 토지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표적인 개혁으로는 과전법의 실시가 있었다. 과전법은 고려 후기에 사유화된 토지를 재분배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관리들에게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보장해 주는 제도였다.

1389년, 창왕마저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이 역시 이성계 세력에 의해 이뤄진 정권 교체로, 고려 왕실의 권위는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다.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 그리고 왕조 교체의 명분

당시 중국 대륙에는 새롭게 명나라가 들어섰고, 고려는 조공과 외교 문제로 명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명과의 평화’를 외교 기조로 삼았고, 이를 통해 전쟁 대신 내부 개혁에 집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왕조를 갈아치우는 것은 단순한 권력 교체 이상의 문제였다. 정당성과 명분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이념이었다. 정도전은 고려 왕조가 이미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했으며, ‘새로운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건국: 새로운 나라의 탄생

1392년, 이성계는 마침내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국호는 ‘조선(朝鮮)’으로 정했으며, 이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건국 과정은 피를 흘리지 않은 무력 혁명이었지만, 그 속에는 정치·외교·사상·군사의 복잡한 변수가 얽혀 있었다.

초대 왕이 된 이성계는 개국 공신들과 함께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했고,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새 국가의 틀을 마련했다. 수도는 한양으로 옮겨졌고, 새로운 관제와 교육 제도가 정비되었다.

역사적 의미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 작전의 철회가 아니었다. 이는 한 왕조의 몰락과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의미하는 정치 혁명이었다.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이 아닌 ‘왕조 교체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조선은 이성계의 회군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선택한 사대부 정치와 유교적 이념은 이후 500년간 조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정도전 『불씨잡변』 중에서

“천명은 덕에 있고, 백성이 지지하지 않는 나라는 천하의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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