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에서 시작된 조선 건국의 서막
1388년, 한 장군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받고 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는 군대를 돌려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이 사건이 ‘위화도 회군’이다.
이 회군은 단순한 군사적 항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탄생을 잉태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왜 회군을 결심했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
14세기 후반 고려는 이미 내부로는 권력 투쟁과 부패, 외부로는 왜구의 침략과 명나라와의 긴장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다. 우왕과 권신 최영은 명나라가 점령한 요동을 되찾겠다며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그들은 고려 최고의 무장이었던 이성계에게 4만 대군을 맡겨 요동 정벌을 명령했다.
이성계는 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이곳에서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전진이 아니라 회군이었다.
이성계가 회군을 결심한 네 가지 이유
국력 고갈과 민생 파탄
이성계는 무엇보다 백성들의 고통을 우려했다. 왜구의 침략과 무리한 국책 사업으로 백성은 기근과 세금에 시달렸고, 군사력도 약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요동 정벌은 나라를 자멸시키는 길이다.” 그는 이렇게 판단했다.
명나라와의 전면 충돌 우려
당시 명나라는 막 강성해지기 시작한 나라였다. 조공과 외교를 중심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명과의 관계 속에서, 요동 정벌은 명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행위였다.
이성계는 무모한 전쟁으로 강대국과 맞서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최영 정권에 대한 불신
이성계는 최영과 우왕이 민심을 잃고 독선적으로 정국을 이끄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고려 내부 권력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고 있었으며, 이 회군은 결국 낡은 권력 구조를 뒤엎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대의명분 확보
당시 이성계는 백성들과 무장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무력만이 아닌 ‘대의’를 무기로 삼았다. “하늘이 명하지 않은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논리는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이었다.
역사적 의의 – 고려의 몰락, 조선의 서막
이 회군은 단순히 ‘병사가 돌아간 사건’이 아니었다. 회군 이후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하고 급진 개혁을 추진했다. 결국 1392년, 조선을 세우며 고려는 막을 내리게 된다. 위화도 회군은 조선 건국의 첫걸음이었고, 동시에 ‘무력과 명분’이 절묘하게 결합된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요약 정리
사건명 | 위화도 회군 |
시기 | 1388년 (고려 우왕 14년) |
장소 | 압록강 하류 위화도 |
주체 | 이성계 (고려 4군 도통사) |
회군 사유 | 국력 고갈, 명나라와 충돌 우려, 정치적 부패, 대의명분 |
역사적 결과 | 고려 멸망, 조선 건국의 서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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