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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의 대립과 한나라의 부상

항우와 유방의 대립과 한나라의 부상진 제국의 몰락과 영웅들의 부상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사망과 조고의 전횡으로 진 제국은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15년 만에 세워진 절대왕조는 백성들의 피로감과 혹독한 형벌, 그리고 무리한 토목 사업으로 인해 반발을 불렀다.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거병하면서 각지에서 봉기 군이 일어났다. 혼란 속에서 두 명의 인물이 무대에 오른다. 초나라 명문가 출신의 항우(項羽), 그리고 하층 백성 출신의 유방(劉邦)이다.항우 – 천하무쌍의 군웅항우는 초나라 명문 출신으로, 삼촌 항량(項梁)에게 무예와 병법을 배웠다. 항량이 죽은 뒤,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며 반진(反秦)의 선봉에 섰다. 그는 기원전 207년, 거록(鉅鹿) 전투에서 진나라 정예군을 대파하며 천하의 주..

중국의 역사 2025.05.11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불타는 조선, 살아남은 문자 한글– 임진왜란 속 한글의 실용성과 부활“나라가 무너질 때, 문자는 살아남았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하였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나라 전체가 무너지고 있던 그 시기, 지식인의 언어였던 한문은 위기를 맞았다.소통이 되지 않았고, 백성과 관료 간의 행정이 마비되었다. 바로 그때, 세종이 남긴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즉 한글이 다시 등장한다.선조실록 속 ‘언문’의 부활평소 유교 원칙을 중시하던 선조는, 한문 사용을 고수하던 군주였다.그러나 전란의 상황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지방관과 군사, 백성들과 빠르게 소통해야 하는 전시 상황에서, 문장이 빨라야 했고, 모두가 이해할 수 ..

한국의 역사 2025.05.11

그림자 재판, 철학이 묻다

그림자 재판, 철학이 묻다― 동굴의 비유, 중용의 덕,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전쟁이 남긴 상처, 철학이 시작한 질문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파르타의 점령을 받아들였다.민주정은 붕괴되고, 30인의 과두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전복되었다. 그 혼란의 시기 속에서, 아테네는 한 노철학자를 죽였다.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기원전 399년, 아고라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이 재판을 지켜본 제자 플라톤은 깊은 충격을 받았고, 철학의 길로 본격 들어선다.동굴 속의 사람들 – 플라톤의 비유플라톤은 저서 『국가(Politeia)』에서,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현실 인식을 ‘동굴의 비유’로 설명하였다.“그들은 평..

서양의 역사 2025.05.10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이유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이유오다 노부나가의 말년 –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1580년대 초, 오다 노부나가는 사실상 일본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다케다, 아자이, 아사쿠라, 이마가와, 미요시 등의 유력 세력은 궤멸하거나 복속되었고, 모리, 우에스기, 호조 등 동서강국도 점차 노부나가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노부나가는 1582년, 시코쿠 정벌을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와 동시에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대한 방비를 위해 토요토미 히데나가와 미나미 간토 지역에 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그 해 5월, 히데요시는 서국(西国)의 모리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 최종전을 위해 노부나가는 교토 인근의 사찰 ‘혼노지(本能寺)’에 머무르며 군세..

일본의 역사 2025.05.10

조희와 노애 – 황제의 어머니와 궁정 반란자

조희와 노애 – 황제의 어머니와 궁정 반란자조희(趙姬) – 진시황의 생모, 풍운의 중심에 선 여인기원전 260년경, 조나라 한단(邯鄲). 한 무희가 조용히 무대를 내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조희(趙姬), 평범한 조나라 여성으로, 무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 그녀를 평범하게 놔두지는 않았다. 당시 진나라 공자 자초(子楚, 자는 이인 異人)는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다. 진나라는 조나라와 대립하고 있었기에, 자초의 처지는 위태로웠다. 그때 그를 주목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대상인(大商人) 여불위(呂不韋)였다. 여불위는 자초를 정치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값진 인물’로 보고, 자신이 후원해 진나라 왕위에 올리려 했다.여불위는 자신의 첩이던 조희를 자초에게 바쳤고, 조희는 그로부터 아이를 임신..

중국의 역사 2025.05.10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그 후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그 후– 훈민정음, 억압 속에서도 피어난 민중의 문자찬란한 시작, 그러나 조용한 탄압의 서막1443년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하였다.그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글을 쓰지 못하니, 이를 가엾게 여겨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장은 『훈민정음』 서문(예의편)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 문자의 등장은 곧 기득권의 반발을 초래했다.『세종실록』 25년 12월“정창손, 최만리 등은 아뢰기를, ‘지금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중국의 도를 본받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와 가까워집니다.’ 하였다.” 최만리와 집현전 일부 학자들은 강하게 반대하였다.그들의 논리는 단순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었다.지식 독점층인 사..

한국의 역사 2025.05.10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전쟁 이후의 아테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전쟁 이후의 아테네"민주정의 폐허 위에, 철학이 시작되다"폐허 속에서 철학이 태어나다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의 손에 항복한 아테네는 더 이상 민주정의 수도가 아니었다. 성벽은 무너졌고, 경제는 붕괴되었으며, 시민들의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전쟁으로 아테네는 물리적 패배뿐 아니라, 정신적 몰락을 경험하였다.이러한 혼란 속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고대 철학의 황금기였다. 그 중심에는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이들은 전쟁 이후의 아테네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철학과 정치의 본질을 새롭게 묻기 시작했다.플라톤 – “민주정은 무지한 다수의 폭정이다”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약 20년 후, 자신의 대표작인 『국가(Politeia)』를 집필하였다. 그는 이..

서양의 역사 2025.05.09

오다노부나가, 악마인가 천재인가

“악마인가, 천재인가”오다 노부나가의 군사혁신과 다케다 신겐과의 대격돌전국시대의 격동 속에서, 단 한 사람의 등장은 모든 질서를 바꿔놓았다. 그의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그는 단순한 다이묘가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냉정한 판단력, 그리고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군사적 실험과 혁신으로 일본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의 존재는 동시대인에게조차 “악마”라 불릴 만큼 이질적이고 파괴적이었다.혁신 1 – 병종 개편: 무사의 시대에서 병사의 시대로노부나가는 무사의 시대를 병사의 시대로 바꾸었다. 전국시대 초기의 전쟁은 대부분 기마 무사와 창병 중심의 전투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서민 출신 농민들을 무장시켜 철포병(총병)으로 전환하였고, 그들을 조직화하였다.『信長公記(신장공기)』에는 157..

일본의 역사 2025.05.09

황제를 죽인 환관 – 조고(趙高)의 제국 음모

황제를 죽인 환관 – 조고(趙高)의 제국 음모배후의 사내 – 황제 곁에 선 환관조고(趙高), 그는 원래부터 진나라 귀족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고는 환관 출신이자 법률에 정통한 율사(律士)로, 진시황의 황자 시절부터 곁을 지켰다고 한다.『사기(史記)』 「진시황본기」와 「이사열전」에 따르면, 그는 진시황의 비밀 업무를 다루는 내시부를 총괄했고, 성격은 교활하고 치밀하며, 자신의 야망을 철저히 감추는 자였다.그는 황제의 말을 절대 어기지 않았고, 황제가 불러 주는 자만 가까이 갔으며, 자신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듣고, 기록하고, 계산하고 있었다.황제의 죽음 – 숨겨진 시신과 조작된 유조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동부 순행 도중 사구(沙丘)에서 병을 얻고 쓰러진다. 그는 급히..

중국의 역사 2025.05.09

세종대왕, 현실 위에 이상을 세운 임금

세종대왕: 현실 위에 이상을 세운 임금– 태종의 칼 위에 글을 세우다태종이 남긴 ‘절대 왕권’, 세종이 펼친 ‘이상 정치’세종대왕은 1397년에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방원은 세종이 어릴 적부터 학문과 품행이 탁월함을 알아보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목하였다.『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종에 대해 “성품이 너그럽고 공손하며, 총명하고도 깊은 뜻이 있다”고 평하였다.세종은 1418년, 아버지 태종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종 시대는 태종이 수렴청정을 중단한 142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그는 단지 유약한 학문 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태종이 피로 일군 왕권 중심 체제를 기반으로, 그것을 활용해 유교적 이상정치와 실용 중심의 문명국가를 만..

한국의 역사 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