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임진왜란으로 향한 전환점
서민 출신에서 전국 무대의 중심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미카와국(三河国)의 하급 무사도 아닌, 오와리국(尾張国)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이며, 젊은 시절에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어 그의 시종으로 출발하였다.
『太閤記』에 따르면, 그는 재치 있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조직 내에서는 항상 윗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성격 덕에 점차 군공을 세우며 중용되었고, 마침내는 시코쿠 및 주고쿠 정벌의 주축 장수로 성장하였다.
혼노지의 변과 기민한 대응
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히데요시는 당시 모리 가문과 전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광석화처럼 퇴각하여 불과 10여 일 만에 야마자키 전투를 벌여 아케치 세력을 토벌하였다.
『川角太閤記』에는 그 퇴각을 “하루에 수십 리를 주파한 기적의 행군”이라 기록하며, 그 기동성과 전략은 이후 히데요시의 정치적 승리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오다 가문을 제치고 실권 장악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오다 가문의 후계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히데요시는 젊은 오다 히데노부를 내세워 ‘노부나가의 유업을 계승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질적인 정권은 자신이 장악하였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꺾고, 158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갈등을 벌였지만 결정적 충돌을 피하면서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결정적 순간은 1585년, 그는 관백(関白)에 임명되며 무가 출신으로서는 전례 없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듬해에는 성씨를 ‘도요토미(豊臣)’로 받으며 정식으로 귀족 반열에 올라,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천하통일의 완성
1587년 규슈 정벌을 통해 시마즈 가문을 복속시켰고,
1590년에는 간토 지역의 거대세력 호조 가문을 오다와라 전투에서 궤멸시키며 사실상 일본 열도를 통일하였다.
『日本王代一覧』 및 『日本外史』에 따르면,
이로써 히데요시는 무력으로 일본 전체를 통일한 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기 소지 금지령(刀狩令)과 농민 분리 정책(兵農分離) 등을 실시하며 중앙집권적 질서를 확립하였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야망의 방향은 조선으로 향하다
하지만 일본 열도의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야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중화문명에 대한 병합 야심을 품었고, 1587년과 1590년을 전후해 조선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는 정식 국서를 보냈다.
『선조실록』과 『일본서기』에는 히데요시가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면서,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니 길을 빌려 달라”라고 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이를 불합리한 요구로 간주하고 거절하였으며, 히데요시는 이를 구실로 1592년, 조선을 침략하는 대규모 전쟁을 개시한다.
임진왜란 – 야망의 끝, 역사의 회오리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며 이른바 임진왜란(壬辰倭乱)이 시작되었다.
왜군은 초반에 빠른 진격을 보이며 서울(한성), 평양까지 점령하였지만, 곧 이순신 장군의 해상 봉쇄와 의병의 저항,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인해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된다.
1593년, 히데요시는 강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597년에는 재차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이 역시 좌절되었다.
『朝鮮王朝實錄』 및 『日本外史』에는 왜군이 현지 저항과 보급 실패, 내부 불만으로 인해 지속적인 퇴각을 겪었다는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
1598년, 히데요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직후 일본군은 철수하게 된다.
『太閤記』는 그가 죽기 직전, “내 죽은 뒤 전쟁을 멈추라”라고 유언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죽음은 도요토미 정권의 쇠락을 가속하였고, 이듬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일본은 도쿠가와막부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결론 – 천하통일과 그 이면의 어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에서 일본 통일의 최고 권력자에 오른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그의 통일 정책과 내정 개혁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과도한 대외 정복 야망은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도 깊은 상흔을 남겼고, 히데요시의 통일은 곧 파국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였다.
그의 등장은 전국시대를 끝낸 사람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새로운 질서, 에도 시대의 서막을 여는 마지막 열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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