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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키우는 대통령의 죽음 - 호세 무히카와 우루과이의 기적적 변화

오늘의 기록자 2025. 5. 25. 07:28

꽃 키우는 대통령의 죽음 - 호세 무히카와 우루과이의 기적적 변화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 5월 13일 세상을 떠난 호세 '페페'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단순히 한 정치인의 삶이 아닌, 남미 소국 우루과이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나라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 선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025년 5월, 한 시대의 끝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무히카는 마지막까지 자신다웠다. 식도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도 "전사에게는 쉴 권리가 있다"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10만 명이 참석한 그의 장례식은 우루과이 역사상 가장 큰 추도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야기는 죽음이 아닌 삶에 있다. 게릴라에서 대통령까지, 감옥에서 대통령궁까지의 여정은 우루과이라는 나라 자체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남미의 스위스"에서 "남미의 화약고"로

20세기 초 우루과이는 "남미의 스위스"라 불렸다. 높은 교육 수준과 안정적인 민주주의, 그리고 선진적인 사회보장 제도로 남미에서 가장 평화롭고 번영하는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호세 바트제 오르도녜스가 첫 번째 임기(1903-1907)와 두 번째 임기(1911-1915) 동안 8시간 노동제, 여성 참정권, 사회보장 제도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복지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유럽보다도 앞선 진보적 실험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양털과 쇠고기 수출에 의존하던 경제가 세계시장 변화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1935년 가난한 꽃 농가에서 태어난 무히카가 청년이 되었을 때, 우루과이는 이미 "남미의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무히카의 개인사는 우루과이의 국가적 위기와 정확히 겹친다. 1960년대 초 그가 투파마로스 게릴라에 가입했을 때, 우루과이의 1인당 GDP는 남미 최고 수준에서 중위권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경제적 좌절이 사회적 분노로, 다시 정치적 급진주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지하 감옥에서 피어난 민주주의

1970년 몬테비데오의 한 술집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6발의 총상을 입은 무히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더 혹독한 시련이었다. 14년간의 감옥 생활 중 11년을 독방에서 보내며, 때로는 말 먹이통만한 구덩이에서 개구리와 쥐를 벗 삼아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극한의 고립이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무히카는 후에 "감옥에서 나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라고 했다. 물질적 소유보다 정신적 자유를, 복수보다 화해를 택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우루과이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12년간의 군사독재는 시민 50명 중 1명꼴로 감옥을 경험하게 하고,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30만 명을 해외 망명길로 떠나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인구 대비 정치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우루과이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1980년 군부가 제시한 새 헌법을 57%의 압도적 표차로 거부했다. "우루과이인들은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1985년 민주화의 출발점이었다.

꽃밭에서 대통령궁으로

1985년 석방된 무히카는 복수 대신 화해를 택했다. 투파마로스는 무장을 해제하고 합법 정당 '대중참여운동(MPP)'으로 재탄생했다. "우리는 총이 아닌 투표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무히카의 정치적 성장 과정은 우루과이 좌파의 발전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1989년 광역전선(Frente Amplio) 창당, 1995년 하원의원 첫 당선, 2005년 농축산부 장관 취임까지, 그는 우루과이 좌파가 야당에서 집권당으로 성장하는 전 과정을 함께했다.

 

2009년 74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무히카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통령궁 대신 허름한 농장에서 거주하며, 공식 차량 대신 1987년산 폭스바겐 비틀을 몰고 다녔다. 월급의 90%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소탈함을 보여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외국 정상들이 대통령궁 만찬에 초대받아도 그는 농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요리를 대접했다. 국제회의 참석 시에도 비행기 일등석을 거부하고 이코노미석을 고집했다. "나는 가난한 대통령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라는 그의 철학이 삶 곳곳에 배어 있었다.

세계 최초의 실험들: 우루과이의 조용한 혁명

무히카 재임 기간(2010-2015) 세계 최초로 마리화나를 완전 합법화하고, 동성결혼을 허용하며, 낙태를 비범죄화했다. 이는 단순한 법 개정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화였다. 특히 마리화나 합법화는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마약과의 전쟁이 실패했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인도주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루과이의 마약 관련 범죄율은 현저히 감소했다.

 

동성결혼 합법화는 우루과이를 남미에서 아르헨티나에 이어 두 번째로 진보적인 국가로 만들었고, 낙태 비범죄화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reproductive rights)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경제적으로도 그의 재임 기간 우루과이는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해 사회 불평등을 완화했다.

 

하지만 무히카의 진짜 업적은 법 개정이 아닌 사회 통합이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고문관과 피해자가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화해의 정치를 실현했다. "증오는 사람을 해치지만,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는 그의 철학이 우루과이 전체에 스며들었다.

무히카와 라틴아메리카의 "핑크 타이드"

무히카의 집권은 2000년대 초중반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핑크 타이드(좌파 물결)"의 일부였다. 브라질의 룰라,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칠레의 바첼렛,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등과 함께 남미 대륙의 좌파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무히카는 다른 좌파 지도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함이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가 반미 포퓰리즘을 추구한 반면, 무히카는 실용적 좌파 노선을 유지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제3의 길'을 보여줬다. 2013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며 소비주의 문명을 비판했다. 이는 좌파적 가치를 담으면서도 전 인류에게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였다.

역사의 아이러니: 게릴라에서 평화주의자로

무히카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극단에서 극단으로의 변화다. 1960년대 투파마로스 시절 그는 무력 투쟁을 신봉했다. 당시 우루과이는 경제 위기와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투파마로스는 "로빈 후드"식 활동으로 시작해 은행 강도, 유괴 등의 무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들의 목표는 사회 정의 실현과 불평등 해소였다. 하지만 점차 과격화되면서 사회적 지지를 잃어갔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폭력을 완전히 거부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우루과이라는 나라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인구 300만 명의 소국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끼인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다. 생존을 위해서는 극단보다는 중용이, 대립보다는 화해가 필요했다. 무히카의 개인적 변화는 우루과이적 정치 문화의 반영이었다.

2025년 무히카의 유산: 작은 나라의 큰 교훈

무히카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정책이 아닌 "정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그는 권력을 개인의 영광이 아닌 국민에 대한 봉사로 여겼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국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브라질의 룰라는 "그는 민주주의를 다른 누구보다 잘 지켜냈다"라고 평가했다. 칠레의 보리치 대통령은 "그가 남긴 것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불굴의 희망"이라고 했다. 현재 전 세계가 포퓰리즘과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무히카의 유산은 더욱 소중하다.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냥 "인간다운" 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줬다.

여운: 작은 나라가 세계에 준 선물

인구 300만 명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국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히카 한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존재가 우루과이인들에게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무히카 퇴임 이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은 계속되고 있다.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해 2025년 3월 취임한 야만두 오르시(Yamandú Orsi) 대통령은 무히카의 제자이자 광역전선 소속으로, 무히카가 추구했던 사회정의와 포용적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우루과이의 진보적 정책들—마리화나 합법화, 동성결혼, 낙태 허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우루과이의 위상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게릴라에서 대통령까지, 감옥에서 대통령궁까지, 증오에서 사랑까지의 여정은 개인의 변화를 넘어 한 국가의 성숙을 보여준다. 무히카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이지만, 동시에 그가 심어놓은 "인간다운 정치"의 씨앗은 계속 자라날 것이다. 꽃을 키우며 살아온 그의 인생처럼, 그가 남긴 희망이라는 꽃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루과이와 전 세계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작은 나라가 큰 세상에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이미지 출처 : 브라질 출신의 팔라시우 두 플라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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