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흥선대원군, 쇄국의 그늘 속 조선의 마지막 수호자

오늘의 기록자 2025. 5. 17. 22:41

흥선대원군, 쇄국의 그늘 속 조선의 마지막 수호자

이 글에서는 19세기 조선의 격변기를 이끈 실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삶과 업적을 살펴본다. 외세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조선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고뇌와 도전,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을 생생하게 전한다.

권력의 중심에 선 왕족

한양의 겨울 찬바람이 대원군 이하응의 굳은 표정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1863년, 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불과 12세의 어린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그는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외세의 침략 위협은 날로 거세졌고,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폐해로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그 어둠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구원할 마지막 불꽃이 되기로 결심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본래 정조의 손자이자 남연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실의 혈통이었지만 정치적 소외 속에서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어린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10년간 조선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했다.

왕권 회복과 세도정치 종식

흥선대원군의 첫 번째 과제는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 씨로 대표되는 세도가문의 권력을 단호하게 제한했다.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고, 인사권을 장악했다. 특히 그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되살려 국정 운영의 중심을 왕실로 되돌렸다.

쇄국정책과 외세에 대한 단호한 대응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업적이자 동시에 비판받는 정책은 강력한 쇄국정책이었다. "양이(洋夷)가 침범하면 싸우고, 화친을 주장하면 죽이라"는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며 외국 세력의 침투를 철저히 차단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서 보여준 단호한 대응은 그의 쇄국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재정 개혁과 경복궁 중건

국내적으로는 개혁 정책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특히 그는 서원 철폐를 통해 양반들의 면세 특권을 제한했고, 원납전제와 사창제를 도입해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당백전을 발행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했으나, 이는 후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왕권 회복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다. 임진왜란 이후 270년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재건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위엄을 되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막대한 부역과 세금이 부과되어 민심이 악화되었다.

개혁의 그늘과 실각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초기에는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 양반과 민중 모두의 반발에 부딪혔다. 서원 철폐는 유림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은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급기야 1873년, 민 씨 세력과 개화파의 연합으로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실각했다.

역사적 평가와 말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할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독립과 존엄을 지키려 한 애국적 몸부림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잠시 정권을 되찾았으나 청나라에 납치되어 3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귀국했지만 이미 시대는 변해있었다.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는 그동안 반일 노선을 고수했던 그의 마지막 정치적 선택이었다. 1898년 2월, 그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강한 민족의식과 개혁 정신으로 기억되는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마지막 수호자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민족의 자존심, 오늘에 남긴 유산

역사의 냉엄한 평가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의 애국심과 결단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이 추구했던 자주독립의 가치는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그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우리는 전통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배운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되, 쇄국이 아닌 주체적 개방으로 나아가는 길, 그것이 흥선대원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그의 시대는 지났지만, 국가의 존립과 발전이라는 그의 고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흥선대원군 인물 요약표

항목내용

 

이름 이하응 (李昰應)
호칭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출생-사망 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출신 가문 전주 이씨 (왕족 출신)
관계 고종(26대 국왕)의 생부
직위/역할 대원군 (왕의 아버지로서 섭정), 조선의 실질 권력자 (1863~1873)
주요 정책 - 쇄국 정책  - 서원 철폐  - 경복궁 중건  - 당백전 발행  - 과거제 개혁
대표 사건 - 병인양요 (1866)  - 신미양요 (1871)  - 임오군란 (1882)
정치적 성향 보수적 왕권 강화, 반외세, 반개화
말년 행적 명성황후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실각, 청나라·일본 간섭 속 복귀 시도 실패
평가 강한 중앙집권의 추진자, 개화 지연의 책임자, 조선 후기 최대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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