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여몽전쟁과 강화도 천도 - 고려가 몽골에 맞선 40년 대항쟁사

오늘의 기록자 2025. 6. 13. 18:31

여몽전쟁과 강화도 천도 - 고려가 몽골에 맞선 40년 대항쟁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파란만장했던 40년을 함께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1231년부터 1270년까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맞서 벌인 장대한 저항의 서사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특히 강화도 천도라는 전무후무한 결단과 그 속에서 피어난 문화적 성취, 그리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몽골 침입의 발단 - 저고여 피살사건과 여몽관계 악화

1225년(고종 12) 겨울, 압록강변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동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도적의 소행이라고 했지만, 몽골은 이를 고려의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팔만대장경, 이미지 출처 : Flickr의  Lauren Heckle

 

당시 몽골은 이미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며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이 1206년 몽골제국을 건설한 이후, 그들의 철기병은 어떤 성벽도, 어떤 군대도 막을 수 없었다. 금나라조차 1234년 처참하게 멸망한 상황에서, 고려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1231년 몽골 1차 침입과 처인성 대첩 - 살리타이 사살의 역사적 의미

1231년(고종 18) 8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했고, 개경이 포위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벌어졌다. 고려군은 선전했지만 절대적인 군사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처인성(현재의 용인)에서 김윤후라는 별장이 활을 쏘아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승리를 넘어선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불패의 몽골군도 죽을 수 있다는 것,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몽골군은 결국 철수했지만, 고려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조공과 인질, 그리고 몽골의 감시관인 다루가치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우는 이미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232년 강화도 천도의 배경과 최우의 전략적 결단

1232년 6월, 최우는 전격적으로 다루가치들을 살해했다. 이는 몽골의 내정간섭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곧 몽골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달 7월, 300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다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렸다.

 

재상 유승단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이 반대했다. 유승단은 "수도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치는 것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최우의 의지는 확고했다. 몽골이 수전에 약하다는 점,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장기항전 전략이었다. 천도 반대파들은 제거되거나 숙청당했고,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이 무모해 보이는 계획에 동의했다.

몽골 9차 침입과 고려의 끈질긴 저항 (1231-1259)

강화도 천도 이후 몽골은 1259년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전 국토가 유린당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특히 6차 침입에서는 20만 6천여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려는 굴복하지 않았다. 김윤후는 충주성에서 다시 한번 몽골군을 막아냈고, 이때 그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열심히 몽골과 싸운다면 신분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직을 주겠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진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신분제를 초월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다. 이는 단순히 지배층만의 전쟁이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음을 보여준다.

팔만대장경 제작과 대몽항쟁기 문화적 성취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놀라운 문화적 성취를 이뤄냈다. 1236년부터 시작된 팔만대장경 제작이 바로 그것이다. 1232년 몽골군이 부인사에 보관된 초조대장경을 불태웠을 때, 고려는 더 완벽한 대장경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일이 힘들다고 하여 다시 만드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강화도 선원사와 남해 분사에서 동시에 진행된 이 대역사는 무려 16년간 지속되었다. 8만여 장의 경판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경전이 아니라 굴복하지 않는 고려인의 정신이었다. 나무를 바닷물에 3년간 담가 처리하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목욕재계하며 정성을 다했다.

1270년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항쟁의 마지막 저항

1259년, 몽골 제국 내부의 권력투쟁과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결합되면서 마침내 강화가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는 항복이 아닌 조건부 협상이었다. 고려는 왕실과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몽골도 더 이상의 소모적인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1270년(원종 11), 38년 만에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때 또 다른 저항이 시작되었다.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가 이 결정에 반발하며 진도에서 무력 항쟁을 이어간 것이다.

 

삼별초는 승화 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3년간 더 저항했다. 비록 1273년 김통정의 자결로 끝났지만, 이들의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정신이 얼마나 완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여몽전쟁이 남긴 역사적 교훈과 의의

 

여몽전쟁은 고려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고유한 문화를 보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화도 체제하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과 같은 문화유산은 오늘날까지 한국 문화의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 영향도 컸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가 막대했고, 경제 기반이 크게 훼손되었다. 특히 농촌 지역의 피해가 심각하여 고려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배경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무신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왕권의 약화와 귀족정치의 변질을 가져왔다. 이후 원 간섭기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려 대몽항쟁이 현대에 주는 메시지

여몽전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과거에는 민족적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강조되었지만, 현재는 보다 복합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시기의 경험은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한다. 첫째, 국제 정세 변화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유연한 대응의 중요성이다. 둘째, 장기적 관점에서의 전략 수립과 지속적 추진 능력의 필요성이다. 셋째, 위기 상황에서도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의 가치이다.

맺음말 - 여몽전쟁의 역사적 위치

40년간의 여몽전쟁은 고려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를 통해 고려는 변화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적응하는 과정을 겪었고, 그 결과 이후 원 간섭 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여몽전쟁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서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내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객관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역사로부터 보다 의미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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