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해동성국, 수십만 발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926년 발해가 멸망한 후, 광활한 만주 벌판에 살던 수십만 발해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려로 간 이들, 거란 땅에 남은 이들, 그리고 '여진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 이들까지. 200년에 걸친 잊혀진 발해인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한 달 만에 무너진 해동성국
926년 1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군대가 발해를 침공했다. 놀랍게도 전쟁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9일 만에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6일 후 수도 홀한성에서 마지막 왕 대인선이 항복했다.

230년간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나라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발해의 영토는 오늘날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이 광대한 땅에는 수십만 명의 발해인이 살고 있었다. 왕조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어디론가 흩어져야 했다.
첫 번째 선택: 남쪽의 형제, 고려로
발해가 거란에 함락되기 직전인 925년부터 이미 발해인들의 대규모 남하가 시작되었다. 고려사에는 장군 신덕 등 500명이 귀순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예부경 대화균, 공부경 대복모 등 고위 관료들이 백성을 이끌고 내려왔다는 기록이 연이어 등장한다.
결정적 사건은 934년에 일어났다.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왕족의 족보에 올렸으며, 서북 요충지인 백주를 지키게 했다. 함께 온 관료와 군사에게는 토지와 집이 주어졌다.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태조 재위 기간 동안 고려로 이주한 발해 유민은 10만 명이 넘었다. 일부 연구는 12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당시 고려 인구가 300~400만 명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왜 발해인들은 수천 리 길을 걸어 고려를 선택했을까? 답은 '고구려'에 있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라 자처했고, 고려 역시 국호 자체가 '고구려'에서 왔다. 두 나라는 공동의 뿌리를 공유했고, 그 공감대가 난민들의 발걸음을 남쪽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고려 태조는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 칭하며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며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서 굶겨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훈요십조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라고 규정한 것은 단순한 적개심이 아니라, 발해 유민과의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두 번째 선택: 정복자의 땅에 남다
그러나 모든 발해인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백 년간 뿌리내린 삶의 터전을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벼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거란이 직접 통치를 강요하지 않는 한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거란은 발해 영토에 '동란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발해 유민들을 관리했다. 발해의 옛 관료들 중 일부는 거란에 협력하여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고, 이들은 이후 고려와 거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또한 거란은 발해인들을 군사적으로 활용했다. 고려를 침공할 때, 심지어 여진족과의 전쟁에서도 발해인 부대가 선봉에 섰다.
1019년 귀주대첩.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의 소배압 군대를 격파한 이 전투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극이 숨어 있다. 거란군의 지휘관 중에는 발해 유민 출신 고청명이 있었다.
같은 전쟁에서 고려군에는 발해 태자 대광현의 후손 대도수가 참전했다. 발해 멸망 93년 만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만주에 남은 발해인들은 세월이 흐르며 '거란인' 또는 '숙여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갔지만, 문화적 유산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금나라 시대까지도 '발해인'이라는 명칭으로 구분되는 집단이 존재했고, 북경(당시 중도대흥부)의 설계를 맡은 것도 발해 유민 출신 장호였다.
세 번째 선택: 다시 일어서는 자들
가장 치열했던 것은 발해 부흥을 꿈꾸던 이들의 투쟁이었다. 멸망 직후 대인선의 동생이 후발해를 세웠고, 압록강 유역에서는 정안국이 건국되어 수십 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1029년,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이 지났을 때였다. 발해의 왕손 대연림이 요양에서 거란에 반기를 들고 '흥요국'을 선포했다. 그는 다섯 차례나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려는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가 안정되어 있었고, 요양은 이미 거란의 핵심 영역으로 공고화된 뒤였다. 흥요국은 내부의 배신으로 1년 만에 무너졌다.
더 놀라운 것은 1116년의 일이다. 발해 멸망 190년이 지난 시점, 발해 유민 고영창이 '대발해국'을 선포했다.
비록 5개월 만에 무너졌지만, 2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도 '발해'라는 국호를 내세우며 부흥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발해 유민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끈질기게 유지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진, 그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
발해 멸망 후 만주에 남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역사에 재등장한다. 거란은 발해 유민을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거란의 통제를 받아들인 이들은 '숙여진', 거란의 영향권 밖에서 반독립적으로 살아간 이들은 '생여진'으로 불렸다.
1115년,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했다. 금나라가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킬 때, 발해 유민들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발해 대족 출신 양박은 아골타에게 황제를 칭하라고 권유했고, 금나라 황실에는 발해 여인들이 자주 황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발해인 정책은 이중적이었다. 문화적으로 앞서 있던 발해인들은 금나라 조정에서 중용되었지만, 동시에 강제 이주와 동화 정책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2세기 중엽, 금나라는 요양의 발해인들을 산동성으로 대거 이주시키고 한자만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발해 유민의 행방을 추적하다 보면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고려로 간 발해인들은 고려인이 되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거란군을 물리친 대도수, 귀주대첩에서 싸운 발해 출신 장수들. 그들의 후손은 고려인으로, 다시 조선인으로,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인으로 이어졌다.
거란 땅에 남은 이들은 거란인이 되었다가, 다시 여진인이 되었다가, 금나라가 몽골에 멸망한 후에는 한족에 동화되거나 만주족의 일원이 되었다.
발해의 역사는 단절되었지만, 발해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고, 흩어진 채로 새로운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고려가 발해 유민들의 증언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고. 그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만주 땅이 누구의 역사인지조차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200년간 이어진 발해인들의 여정. 그것은 국가의 멸망이 곧 민족의 소멸이 아님을, 그리고 역사란 승자만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발자취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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