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226 사건 - 일본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가 바꾼 역사

오늘의 기록자 2025. 6. 1. 11:03

226 사건 - 일본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가 바꾼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인 226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1936년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이 쿠데타가 어떻게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 도쿄에 울린 총성의 의미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 하얀 눈으로 뒤덮인 도쿄 시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20대의 젊은 장교들이 이끄는 1,483명의 군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정부 요인들의 사저를 습격했다. 그들의 깃발에는 '존황토간(尊皇討奸)' - 천황을 받들어 간신을 친다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가다정 일대를 점령한 황도파 장교들

 

이 날의 쿠데타는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니었다. 일본 근대사의 분기점이 되어 군국주의로의 돌이킬 수 없는 질주를 시작한 226 사건의 진실을 들여다보면, 한 국가가 어떻게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군 파벌 갈등의 실체 - 황도파 vs 통제파

226 사건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일본 육군 내부의 깊은 균열을 살펴봐야 한다. 1930년대 일본군은 황도파(皇道派)와 통제파(統制派)라는 두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황도파는 천황의 친정과 관료, 재벌 같은 특권 계급의 타파를 목표로 하는 파벌이었다. 이들은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하여 대소 결전론을 주장했으며,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시아 해방론을 내세우면서도 일본의 독자적인 대외 팽창을 지지했다.

 

반면 통제파는 국익과 현실적인 군사력 증강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점진적이고 계획적인 대외 팽창을 선호했으며, 총력전 체제 구축을 통한 국력 신장을 추구했다.

우가키 군축이 만든 파벌 대립

이 대립의 뿌리는 우가키 가즈시게가 추진한 군축에서 비롯되었다. 우가키는 나가타 테츠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으로 보임하고 지상군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군축했다. 그리고 그 예산으로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고 보병 부대에도 경기관총, 곡사포를 장비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등은 우가키 인맥이 아니라서 소외되었고, 이것이 황도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기타 잇키의 위험한 사상 - 일본개조법안대강의 영향

청년 장교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라는 독특한 사상가가 있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통수권이 농락을 당하는' 현실에 분개하던 청년 장교들에게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비롯한 기타의 저작들은 큰 영향을 미쳤다.

 

기타 잇키는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반천황적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기타 잇키에게 천황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었다. 천황이 현인신으로 신격화되어 절대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지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사상은 극도로 충격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에서 기타가 제시한 개혁안들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화족제도(일본의 세습 귀족제)와 귀족원 폐지, 사유재산 상한제, 재벌 해체, 황실재산 감소 등 기득권층의 특권을 완전히 뒤엎는 내용들이었다.

 

기타 잇키는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쿠데타를 통해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키고, 전략산업을 국유화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급진적 국가개조를 꿈꾸었다. 기타 잇키의 이러한 급진적 사상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매우 어려웠고, 실제로 그의 저작들은 금서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기타의 영향을 받은 226 청년장교들은 천황을 오로지 도구로 삼는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천황에게 충성했으며, 이것이 그들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226 쿠데타 전개과정 - 피의 새벽

1935년 8월, 황도파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가 통제파의 나가타 테츠잔 소장을 대낮에 군도로 참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두 파벌 간의 갈등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다. 설상가상으로 통제파는 황도파의 본거지인 제1사단을 만주로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인 청년 장교 22명은 1936년 2월 26일 새벽 1,483명의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정부 요인들을 습격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은 반란군 약 100명에 의해 총에 쏘이고 군도로 찔려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은 사저에서 반란군 150명에게 47발을 발사당해 살해됐다.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교육총감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쇼와 천황의 분노와 쿠데타 실패

그러나 운명의 순간은 천황의 반응에서 왔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쿠데타 발발에 당황하던 쇼와 천황이었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하여 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천황의 노여움을 초래했다.

쇼와 천황은 "충성이고 나발이고 내 군대가 내 명령도 없이 움직인 것 자체가 이미 반역이고, 그것들은 이미 내 군대가 아니다"라며 역정을 냈다.

 

2월 2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28일 천황의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지자 반란군은 명분을 잃었다. 반란군은 천황 친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는데, 천황이 복귀 명령을 내리자 반란의 근거를 잃은 이들은 부사관과 병을 원대복귀하게 하고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재판을 통해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고, 기타 잇키도 처형되었다.

226 사건의 역설적 결과 - 통제파의 완전한 승리

그러나 226 사건의 진짜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226 쿠데타군이 응징 대상으로 삼았던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고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굳어졌다.

 

군부의 광기를 목격한 일본 정치가들은 이후로는 감히 군부의 뜻을 거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226 사건으로 퇴진한 오카다 내각의 뒤를 이어 1936년 3월 5일 히로타 고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히로타 내각은 군부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예산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7년부터 1942년까지 6년에 걸쳐 41개 사단과 142개 항공중대 증강이 결정됐고, 해군은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포함한 함정 66척 건조에 돌입했다.

226 사건이 현재에 주는 교훈

226 사건은 오늘날에도 여러 교훈을 던진다. 첫째, 엘리트 집단 내부의 파벌 갈등이 어떻게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일본은 사관학교 졸업 장교의 50% 이상이 고위 장성의 자제이거나 관료, 사무라이, 지주 출신 등 기득권 세력의 자제들이었다.

 

둘째,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젊은 세대에게 미치는 치명적 영향력이다. 기타 잇키의 급진적 사상에 매료된 청년 장교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으며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반대했던 세력에게 더 큰 권력을 안겨주는 역설을 낳았다.

 

셋째, 민주적 통제 장치의 중요성이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고 민간 정부를 위협할 때, 그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역사의 경고다.

226 사건의 아이러니

226 사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쿠데타의 실패가 오히려 쿠데타 세력이 반대했던 바로 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부패한 정치인과 재벌을 척결하고 천황 중심의 순수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폭력적 행동은 오히려 통제파에게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고, 결국 일본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끈 도조 히데키 같은 인물들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폭력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순수한 동기라 할지라도, 민주적 절차와 법치를 무시한 폭력적 변혁 시도는 오히려 그들이 원했던 이상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226 사건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의 늪에 빠져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는 참담한 패배를 맞게 된다. 젊은 장교들의 '순수한 열정'이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선의로 한 일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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